함브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업과 사회에 대한 관찰
드러커는 1927년 빈 김나지엄을 졸업하고, 그 해에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27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 견습서기로 취직한 지 4개월 만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에 돌아왔다. 그런 드러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간지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Austria Economist)의 신년 특집호의 편집회의에 나오라는 초대장이었다.
드러커는 열 네댓살 무렵부터 그 잡지를 애독하고 있었으나 편집자와는 만난 일은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에서도 이름있는 잡지였다.
창간 당초는 [런던 이코노미스트](London Economist)를 모델로 하고 있었으나 차츰 경제, 비즈니스 뿐 아니라 국제정치, 과학, 기술의 각 분야까지 활기찬 이색적인 잡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지의 창업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i, 1886∼1964) 가문의 선조는 유럽의 [철도왕]이었다. 나중에는 미국과 유럽의 [철도왕]이 거의 예외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고 1900년 경 파산의 비운 속에서 타계했다.
폴라니 가문은 (조상도 그리고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의 소유주도) 각각 자기가 목표 삼았던 위업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그들 누구나 [사회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the society)이란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회를 단념하고 사회에 절망했다.
[방관자의 모험]에서 드러커는 당시의 관찰을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부차적인 것이 될지도 모르며, 나아가서는 사회의 조직이 궁극적으로는 중요치 않은 것이 되거나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멸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시대]에서 [오류없는 종교]가 부차적인 것으로 된 것처럼,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에 의한 [오류없는 사회]라는 개념이 여전히 폭을 넓히고, 그것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세계를 비관용, 자유의 완전한 상실, 자기파괴적 전쟁이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시대]의 소멸은 아직 먼 장래의 일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카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통합을 목표로 한 훌륭한 종교사상가들이 그로부터 50년 후에 좌절을 맛보게 되면서 [오류없는 종교시대]의 종언의 전주곡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하는 제 3의 사회를 목표로 한 폴라니 집안의 좌절이 [오류없는 사회의 시대]의 종언의 전주곡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드러커의 관찰은 나중에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사회가 지식사회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탕이 된다.
신문기자와 편집인 그리고 강사 시절
1929년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이적했다. 재학중 독일의 오래된 어느 머천트 뱅크의 증권 애널리스트로 취업했다. 이 머천트 뱅크는 나중에 미국 월 스트리트의 주식중개업자의 유럽지점이 되었다. 증권 애널리스트로서의 드러커의 일은 1929년 가을의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짧게 끝났지만,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짜이거》(Frankfurt General Anzeiger)의 금융기자로 채용되었다.
드러커는 193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드러커는 신문 편집자로서의 일 외에도 또 한 몫의 일이 더 있었다. 드러커는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법학부에 시간강사의 적을 두고 있었다.
1931년에는 국제공법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무렵에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던 국제법 담당의 병약한 노교수 대역으로 법학부 강단에도 섰던 것이다.
런던시절
1933년 드러커는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의 보험회사 및 은행에 근무했다.
1934년 드러커는 베링턴 아케이드(Barrington Arcade)에서 개최된 일본회화전을 감상했는데, 그것은 드러커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근무하던 중 도리스 슈미트(Doris Schmidt) 여사와 만나 1937년 초 결혼했는데, 드러커 부부는 그후 4명의 자녀와 6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당시 영국의 분위기는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말했듯이 [후퇴]의 시대였다. 영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든 외국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영국 자신이 비로소 깨달은 시대였다.
영국은 하루바삐 인도로부터 독립하여 그것을 축하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드러커는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는 정도는, 노예가 주인에게 의존하는 정도보다 휠씬 높게 마련이다."
드러커가 런던에서 1934년경 한동안 근무했던 프리드버그회사는 머천트 뱅크(어음 인수를 주로 하는 개인 경영 금융업자)였다. 드러커는 당시 프리드버그회사를 간혹 방문왔던, 창업주 프리드버그의 친구이자 미국 베른하임 백화점의 주인이었던 헨리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매에는 두 가지 원칙밖에 없지. 단 2센트라도 싸게 팔면 틀림없이 이웃 가게에서 손님을 끌어올 수 있다. 이것이 첫째 원칙이다. 진열장에 진열하지 않으면 상품은 팔리지 않는다. 이것이 둘째 원칙이다. 다음은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지.
손님은 합리적이 아니다라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상인이 태만한거야. 손님이 이쪽 희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손님은 합리적이 아니다'라는 얘기 따위를 해선 안돼. 그런 건 상인의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손님을 만족시키는 것이고, 이 가게에서 또다시 사고 싶다는 생각을 손님에게 심어주는 거지." 이렇게 보면 헨리는 소매업계의 일대 혁신자였고, 진정코 고객만족 중심 경영을 펴고 있었으므로, 드러커는 그와의 만남에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러커는 "기업이란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고객지향적 경영철학을 확립한다. 헨리는 "저희 회사는 손님께서 만족할 수 있음을 보증합니다. 불만이 있으실 때는 언제고 돈을 돌려드립니다."라는 방침을 채택한 최초의 소매상이었다.
이것은 시어스 로벅이나 월마트 그리고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유통업자들이 그런 정책을 채택하기 훨씬 전이었다.
드러커가 "하지만 헨리 아저씨, 손님이 일단 입은 드레스를 세탁해서 가지고 와도 반품에 응합니까?" 라고 질문하자, 헨리는 "물론"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손님의 입장이 상인의 입장과 다를 뿐일세."
드러커는 학문적인 일을 원했지만 단순한 학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과 실무라는 두 개의 희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영국에서는 불가능한 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용이하다고 생각하여 1937년 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일단(一團)의 유럽은행 및 신탁회사의 주미 이코노미스트 및 영국 신문사의 주미 경제 주필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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